The Horizon: The Area of Reality and Possibility
변영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한 장소를 오래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마주하면 우리는 과거와 같은 것을 보게 될까. 장소는 여전히 그곳에 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이전과 같지 않다. 그 사이 축적된 경험은 기억과 감각에 조금씩 흔적을 남긴다. 다시 마주한 풍경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동시에 지금의 감각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진다. 달라지는 것은 풍경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시선일 것이다.
이호진의 회화에서 ‘본다’는 문제는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초기 작업에서 그는 도시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형상과 움직임을 한 화면에 중첩시켰다. 개별적인 이미지와 빠르게 뻗어나가는 선들은 서로 얽히고 충돌하면서 밀도 높은 화면을 이루었다. 이동하는 시선에 연속적으로 포착되는 여러 순간을 담은 듯한 회화였다. 세계로부터 밀려드는 시각적 경험을 수집하여 표현하는 것이 당시 작업의 중요한 축이었다면, 시간이 흐르며 그의 관심은 무엇을 바라보는가의 문제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간다. 이러한 관심은 개인전 《변곡섬》(2021)과 《경로》(2023)를 거치며 자신의 위치와 그곳에 이르는 경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주변의 관계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그 사이를 지나며 만들어지는 경로를 바라보는 과정은 외부의 세계가 개인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에 대한 탐색으로 확장되었다.
이와 함께 조형적인 변화도 나타난다. 과거의 작품에서 강한 색과 선들이 서로 부딪치며 하나의 응축된 덩어리를 만들었다면, 최근의 그림에서는 형태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색들이 서로 스며든다. 대상을 빠르게 붙잡던 선은 물감의 층 안으로 침잠하고, 덧칠되고 지워진 흔적이 화면 곳곳에 남는다. 연두, 연보라, 하늘색, 흰색과 같은 밝은 색채가 도드라지고, 비어 있는 듯한 공간이 등장하면서 그림에는 이전보다 느린 호흡이 생겨난다. 평온함과 고독, 행복과 우울이 뒤섞인 개인적 정서는 직접적인 서사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화면의 밀도, 색의 겹침, 붓질의 속도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호진이 그리는 풍경은 실제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이를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장면들은 작가가 거쳐온 여러 장소와 그때의 감정이 한 화면에서 뒤섞이며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 〈지평〉(2025)과 〈장면〉(2025)에는 도시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건물과 나무, 길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화면 곳곳에 나타나지만 이내 붓질과 색채 속으로 흩어진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적인 선 역시 지평선을 명확하게 그려내기보다 구체적인 풍경과 추상적인 형상 사이를 오간다. 이러한 모호함은 경험이 기억 속에 남는 방식과 닮아 있다. 어떤 장면은 선명하게 남고 다른 부분은 희미해지듯, 화면 위에 반복해서 더해지고 가려지는 물감의 층은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겹쳐지고 변화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는 대형 캔버스들은 각각의 화면을 이루면서도 색과 붓질, 반복되는 형상과 수평적인 흐름을 통해 서로 이어진다. 개별 작품에서 시작된 풍경은 전시장 전체로 확장되어, 관람자는 그 사이를 이동하며 변화하는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 형상은 함께 선보이는 오브제에서도 이어진다. 입체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로 변주된 오브제는 회화와 함께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The Horizon》은 그렇게 축적된 시간 위에서 다시 앞을 내다보는 전시다. 이전 작업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탐색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곳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간이 무엇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가이다. 전시 제목인 ‘지평선(Horizon)’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지평선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떠올리게 한다. 지평선은 언제나 현재의 위치를 기준으로 생겨나지만 동시에 아직 닿지 않은 곳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부제 ‘The Area of Reality and Possibility’의 ‘현실’과 ‘가능성’은 현재 서 있는 지점에서 맞닿는다. 지금 이곳은 지나온 시간이 도달한 현실인 동시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다음 장면을 조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The Horizon》에서 이호진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도착점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변화를 확인하는 순간에 가깝다. 과거의 화면을 가득 채웠던 세계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관계와 장소, 움직임은 오랜 시간을 지나 이제 색과 흔적, 여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번 전시는 현재의 위치를 바라보는 동시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시선을 열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