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Period and Hyphen

정소영 캔파운데이션 큐레이터

유독 한국에서 동일한 언어에서 파생되는 논쟁을 대표하는 것은 ‘첫사랑’에 대한 규정이 아닐까 한다. ‘첫사랑’이라 하면 누군가에게는 ‘처음 사랑을 느낀 대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처음 사귐의 대상’으로 사회적 이중성을 지닌다. 다의어라 지칭하기 어렵지만, 개인의 문화, 경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동일한 언어가 가지는 다중성의 회색 영역은 때문에 소통의 부재를 양산한다. 과연 그 회색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언어뿐일까? 회색이라 말하기 이전의 흰색과 검은색, 우리가 정답이라 믿는 것들과 그 밖의 것들 사이를 나누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의 시작은 그렇게 언어에서 시작해 사람들에게 잠재된 회색 경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다수의 사람은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 정보 중 객관적 정보를 신뢰할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 정보는 어떻게 탄생할까.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과학적 근거 또는 다수의 데이터가 만들어낸 수치를 기반으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근거와 다수의 데이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흔히 객관적 정보로 인식되는 통계자료는 다수의 표본집단이 내는 통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다수의 표본집단은 결국 하나의 주관적 정보가 아닐 까.
인터넷이 생활화 된 이래로 수 없이 떠도는 객관적 정보에서 결국 신뢰하게 되는 것은 주관적 정보일 때가 많다. 물건을 살 때 사용자들의 리뷰나 가장 정확해야 할 언론이 선거 전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보면 결국 이 역시도 누군가의 주관적 정보이다.

이번 전시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정보이자 사회적 약속을 대표하는 언어를 중심으로 언어학자인 소쉬르(Saussure Ferdinand de)가 언급한 언어의 분류인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기표를 대표하는 객관적 정보의 불완전성과 사람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기의의 다양성 사이에 존재하는 선입견에 대한 반기를 전시로 표현하려 하였다.
작가를 선정함에서는 문화와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객관적 정보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각기 다른 카테고리에서의 작가를 선정하려 노력했다. 이에 언어를 가지고 작업 할 수 있는 작가 중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는 로와정,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홍지연, 다른 문화 간의 인식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스페인 작가 보르하 로드리게즈(Borja Rodriguez Alonso)를 선정하게 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르하 로드리게즈의 Google Trilogy 중의 하나인 작품을 확인 할 수 있다. 는 특정 단어나 문구가 구글(Google)의 검색 엔진을 통해 어떻게 자동으로 완성되는지 보여주는 영상작품이다. 알고리즘을 통한 구글 엔진에 입력된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제시어들은 현재 인터넷 사용자들의 관심, 고정관념, 환상을 나타냄과 동시에 검색 행동 양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기술 발전으로 얻어진 정확한 데이터 값이라 여겨지는 정보의 덩어리가 또 다른 가상의 창조물이 되어 이용자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모순을 표현한다. 때문에 전시장 초입에 있는 보르하의 작업은 오래된 집을 찾은 관람자가 전시장을 하나의 가상세계로 보고 현실과의 괴리에서 스스로 갖는 모순을 검색하길 유도한다.
오래된 집 중정을 비추는 유리창 너머 처마 끝에는 풍경의 모습을 띈 로와정의 작품이 결려 있다. 전시장 내 가득 찬 맑은 풍경 소리에 문을 열고 마루에서 흔들리는 풍경의 모습을 찾지만 탁설(鐸舌)은 이내 움직임이 없다.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움직임 없는 풍경에서 들리는 소리는 풍경 아래 달린 황동판의 모습만큼이나 생경하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스(Emily Elizabeth Dickinson)의 시 구절을 뭉쳐 만들어진 황동의 모습은 에밀리 디킨스의 시에 담긴 형상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을 이야기한다. 또한 관람객 스스로가 체험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차이를 통해 사람이 ‘직접 보고 느꼈다’라고 말하는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 오감에 대한 불확실성의 의문을 제시한다.

If I could tell how glad I was
I should not be so glad-
얼마나 반가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반가워서는 안 된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작업을 선보이는 홍지연은 3개의 신작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하였다. 오랜 한국 전통가옥 두 채가 하나의 전시장으로 탄생한 ‘오래된 집’이라는 전시장의 특성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붉은여인숙>과 <붉은여인>은 작가가 김경욱의 단편소설 『만리장성 넘어 붉은여인숙』에서 착안한 단어이다. 언어가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고 있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홍지연은 각 나라의 언어에 담긴 특수성과 역사성에 대해 주목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여인숙>의 ‘여인숙’이라는 단어는 단어 자체에 ‘여인숙’이라는 단어가 활발히 사용되었던 70~80년대 한국의 숙박업소라는 시대적 배경을 담는다. 또한 간판이라는 특성에 담긴 언어를 통한 사회의 암묵적 동의 지시 대상물이라는 특수성을 흩날리는 전광판의 모습을 통해 상실된 사회적 동의에 대한 혼돈을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홍지연은 <붉은여인>과 <붉은여인숙>을 파란색 안료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것과 소리 내 읽게 되는 ‘붉은여인’과 ‘붉은여인숙’이라는 말의 대비를 관객이 직접 경험하게 한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쏴>는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의성어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주룩주룩’, ‘쏴’와 같은 의성어와 함께 보이는 빗살의 흰 종이는 흰 벽을 만나 그 자체로는 가독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이내 종이와 벽면 사이 틈으로 비추는 빛의 그림자로 읽히는 글귀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모양새를 달리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언어에 담긴 시간성과 역사성을 빛의 그림자로 표현한 것이다.

전시장 가장 마지막에 있는 로와정의 또 다른 작품 <거울>은 전시되는 오래된 집 화장실에 맞춘 장소특정적 미술이자 전시 전반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투명 아크릴로 화장실 거울에 부착된 ‘Doubtful Faith(의심하는 신념)’은 지금까지 전시를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한 객관적이라고 믿는 정보의 오류에 대해 다시 한번 관객 스스로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하게 한다. 전시의 제목 <마침표와 붙임표 사이>는 이렇게 전시를 통해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서 마침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시를 관람한 관람객 스스로가 느끼는 감상까지를 전시 일부로 보고 이를 붙임표로 표현하였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함께 전시 구성에 가장 초점을 둔 것은 사전에 제공하지 않는 전시 정보에 대한 부분이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이 관람자의 주관적 감상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번 전시의 모든 전시 정보는 전시 관람 후 구글 폼(form)을 통해 신청한 이들 만이 확인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전시정보라는 객관적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에 대한 경계와 작품과의 일대일 조유에서 반응하게 되는 관람객의 반응까지가 또 다른 정보의 생성으로 전시에 포함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전시라고 기대하는 선입견에서부터 탈피하는 것이 전시의 시작과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코로나19로 당연하다고 여기던 많은 것들이 상실된 요즘, 이번 전시가 우리의 당연함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