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거처

어둠 속 그림자 하나가 걸어간다. 한껏 뭉게뭉게 피어오른 섬광 아래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긴다. 저기 실루엣으로 남은 사람, 우리는 그이의 이름을 모른다. 얼굴도 모른다. 어찌하여 혼자인가, 어디에서 떠나온 것일까, 지금 불안에 떨고 있는가 아니면 안도하는가, 궁금증이 더해진다. 아이처럼 둥글고 작은 몸이다. 그이는 누군가의 과거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누군가 가지게 될 미래일 수도 있겠다. 그이가 누구일지라도 꽃 같은 삶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기, ‘꽃 같은 삶’ 하나가 그림의 소실점이 되어 네 모퉁이로 흩어지는 세상을 가까스로 잇는다. 이곳의 어둠은 너무 짙고 불빛은 지나치게 밝다. 그러나 그 길 끝에도 결국 땅은 하늘과 맞닿는다.

전은희의 〈나의 집으로〉이다. 밤 산책을 그린 풍경화라고 그냥 여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실은 이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 못하다. 작가의 전작(前作)을 떠올려보니 그런 것이다. 그간의 작업에서 그는 전쟁에서 천재지변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재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건의 무고한 희생자에 대하여 주목해 왔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숲 어딘가에 비극이 숨어 있지 않은지 자꾸 살펴보게 된다. 화폭 위 푸르게 번지는 빛에서는 전쟁의 포화를, 인물의 뒷모습에서는 고향을 등지는 난민을 떠올리며 그 종적을 찾는다. 아무 일이 없을 리 없다는 듯 그림 속에서도 평온을 불순하게 의심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딘가 있을 법한 불행을 구태여 찾아 헤매는 나의 시선이 도통 마땅치 않다. 그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내일 아침 뉴스에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사건과 사고와 재난을 마주하리라 예상한다. 매일 더 불행이 익숙해지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감각해진다. 안타깝지만 내 일은 아니라는, 객관(客觀)을 가장한 방관(傍觀)적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어느새 나 역시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관람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되돌아본다.

“모두 영혼 없는 관람자들이다.”

전은희의 작업에서 사물이 아닌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개인전 《관람자들》(2019)부터였다. 그가 그린 이들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소시민이었고,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이었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작가는 애통해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폭력과 쟁탈과 파괴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고스란히 옮겼다. 일상이 와해되고 생사가 오가는 사람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작가 의식의 발로였다.

불타오르는 마을, 흩날리는 잿가루, 피 흘리는 사람, 갈 곳 잃은 발걸음, 그리고 무수한 무덤, 무덤들. 처음에 작가는 폐허와 소요 사태를 저 멀리 바라보며 대지를 뒤덮은 연기를 포착하고, 웅성이며 서성이는 조난자들의 뒷모습을 조심스럽게 그렸다. 그러나 주제에 몰입하고 사건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할수록 작가의 분노와 슬픔도 구체화되었고, 그의 시선은 더욱 집요하게 대상을 파고들었다. 외면할 수 없다면 대상을 정면으로 직시하여야 한다. 저 눈빛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죽이지 말지어다.” 화면 가득 얼굴이 담긴다. 그의 작품 중 〈아이 2〉(2022)에서 화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푸른 안광의 소녀는 울고 있지 않아도 두려움을 가득 안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과거에도 비슷한 눈을 본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와 식민 시대의 사진 속 인물의 표정이 소녀에게서 겹쳐 보인다. 기술이 발전할지라도 인류사의 작동 원리는 제자리걸음이다. 재난은 회귀한다. 어리석음은 되풀이된다. 비단 사람뿐이 아니다. 하나의 아픔을 보듬다 보면 다른 아픔이 안겨 들어온다. 땅의 초목도, 땅끝에서 마주하는 바다도, 물살을 가로지르는 해양 생물도, 그 외에도 자의가 아닌 힘으로 제자리를 잃은 모든 것들이 다 애처롭다. 북극이거나 아마존이거나 폭력과 파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삶이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거늘.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작가는 점차 지역 분쟁에서 환경 오염, 기후 변화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소재를 넓히고 발언의 수위를 높여 왔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경고를 받았다》라며.

요컨대 전은희의 작업은 말 없는 이들에게 공명하는 그림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일에 대하여 호소하기 위하여 그린 것이지, 정치적 선언(manifesto)이나 선전(propaganda)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예술 실천으로서 재난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체화하기에 오히려 가깝다. 사회적 주제에 천착할수록 그는 화가로서 작품 소재와 기법을 어떻게 맞추어 갈지 고민이 뒤따랐다. 이를테면, 재난의 규모는 슬픔의 감정보다 시각을 압도한다. 그러나 재난의 스펙터클을 화폭으로 그대로 전사(轉寫)하여서는 안 된다. 권력의 시스템과 무분별한 욕망은 교묘하게 작동하여서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를 그리는 붓질은 실체적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그 시간성을 담기에 한 장의 종이는 참으로 얇은 것이다. 보도사진이 고발할 일을 그림이 대신할 필요는 없다. 회화, 그것도 한국화 특유의 매체성 안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마주하고 고심하며 이번 전시 《지상의 거처》의 출품작이 마련되었다.

고뇌가 깊었기 때문일까, 새 작품에는 화폭에 쌓인 선과 색, 내용의 층위가 한결 두터워졌다. 〈어제의 세계〉 연작은 그저 평범한 풍경화 같기도 하고, 더 형태가 뭉그러진 〈우리는 내일 어디로 가나요〉는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는 작가의 기존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재료들이 중첩되며, 더욱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시간성을 내포한다. 그림에 쌓이는 기법과 형식의 시간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인 세계의 역사가 화폭 안에서 함께 소용돌이친다. 목탄과 아교와 물감이 켜켜이 장지를 쓸고 덮고 뒤엉켜 뭉그러지는 것이 세상과 닮아간다. 가령 종이 위 저기 구석에 숨어있는 사람을 안개 같은 붓질이 쓸고 지나가고, 다시 나무가 그려진다. 나무를 그린 목탄의 굵은 선이 거칠게 자기 목소리를 내세우다가 담채로 감싸여 저 멀리 하늘로 휘날린다. 그림 속 폭격일지 석양일지 모를 붉은 대기는 물거품에 뒤엉킨다. 바위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쓰레기 더미 같기도 한 언덕은 어설프나마 사람을 지탱한다. 여기저기 불꽃은 피어오르나 산천의 바람 소리가 그 타오르는 외침을 잠재운다. 한 겹의 역사 위로 다른 역사가 덧쓰인다. 땅의 이야기가 중첩된다. 더 이상 세상사가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작품의 곳곳에는 여전히 죄 없는 피해자가 웅크리고 있다. 〈사소한 일〉의 바다는 가자지구의 소녀 ‘힌드’를 추모하며, 〈이방인〉, 〈기다리는 사람들〉 등의 소품은 저마다 떠 있는 섬처럼 전시장에 배치되어 이러한 ‘사소한 일’이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간의 논리보다 더 큰 법칙이 있다. 짙은 밤, 추운 겨울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우주의 순환은 현재의 어둠이 결코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비록 오늘은 어두울지라도. 인간의 잘못을 줄곧 보면서도 폐허 위에 피어나는 자연은 과거를 전부 끌어안으며 새 날을 준비한다. 삶은 취약하다. 그러나 좌절이 스러지고 난 자리에 다시 희망이 솟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 거대한 자연은, 거친 눈보라를 버텨내고 새 생명을 틔어내는 그 강인한 자생성과 회복성으로부터 인간사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준다.

결국 오늘을 지탱하는 힘은 지금 이 시각도 ‘어제’가 되리라는, 이 어둠이 과거의 것이 되리라는 희망이다. 좋은 시절(Belle Epoque)이 어제가 되어버린 전쟁의 시대가 있었듯, 험한 시절이 ‘어제’가 되는 세계도 올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어두운 오늘이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남지 않기 위해 전은희는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온 마음을 실어 그림을 그림으로써 내일을 앞당겨 부른다.

이번 전시 내내 작가는 “우리는 내일 어디로 가느냐”고 자문하며, 반복되는 역사의 통시성과 흩어진 고통의 공시성을 그림 속에 새긴다. 돌이켜 보면 그의 작업에는 초기부터도 ‘없는’, ‘부재한’, ‘사라진’ 등의 단어가 유난히 자주 제목에 사용되었다. 이름도 없고, 집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이렇게 그가 그려온 “없는” 것은 태생적 결핍이 아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맹목적 침탈 등 불의의 계기로 가지고 있던 것을 잃게 된 사고이자 상실이다. 상실에는 마땅한 애도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불같이 타오르는 세상은 그 애도의 감정조차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단지 어서 떠나가라며 등을 떠민다. 그의 작품 속 ‘말 없음’은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문이 막히도록 먹먹한 것이다. 전은희는 바로 이와 같이 ‘없어진’ 이들을 대변하여 붓을 든다. 사람이거나 동물이거나 사물이거나 쫓겨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지상의 거처를 애써 꿈꾸어 본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아서 그림에서나 찾는 곳이거늘, 그림에서조차도 무엇보다 낮고 가까워야 할 ‘지상’이라는 단어가 마치 도달해 본 적 없는 ‘천상’만큼이나 멀고도 낯설게 느껴진다.

지상의 거처. 이 땅을 딛고 있는 모든 것들이 존중받기를 바라며 지은 이번 전시의 제목은 사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시집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가 살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벌써 여러 세대의 시간 차이가 나는데도, 왜 이다지도 달라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그가 꿈꾸던 평화는 전은희가 꿈꾸는 ‘내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상에서 공존과 아픔의 공감이다. ‘함께(共)’라는 한자는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는 모습에서부터 나왔다고 한다. 예술가의 두 손에는 무엇을 담아 받들어야 할 것인가. 예술가라면 누구라도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테지만,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강령이 되어서도 안 되고 마냥 낭만적인 감상이어도 안 될 것이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누구보다도 세상을 사랑했던 노시인의 말로부터 예술가가 나아갈 지혜를 구해 본다. 모두의 삶은 치열하다. 여기, 모두의 삶을 아프도록 바라보는 작가 전은희의 작업이 있다.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답을 구한다. 그러나 그 답은 유일한 답도 아닐 것이며,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찾는 답이 잠시 지상의 삶에서 몸을 기댈 안식처가 되기를, 그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이곳의 땅이 하늘에 닿기를, 그 꿈을 잃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김소라(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