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강산(禽獸江山)을 여유(旅遊)하다.
2018년 스페이스 캔에서 개최되는 이재훈 개인전 <아, 禽獸강산>은 “우리가 살고 있는 비가시적이며 추상적인 사회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사회를 어떻게 시각화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그의 저서 《공간과 장소》를 통해, “공간(space)이란 그 자체로 단지 물리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지만, 공간이 가치와 경험을 갖게 되는 순간 그 곳은 장소(place)가 되어 사람의 일상을 바꿔놓는다.”라는 개념을 역설한다. 이에 작가는 ’사회‘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공간과 장소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획에 있어 ‘정원(庭園, Gardening)’이라는 가시적 메타포를 전격적으로 기용한다. 이는 사회적 현상과 제도에 대한 인식을 풍경과 정물로 시각화함으로써, 사회를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치와 경험의 ‘장소’로 변화시키고자 함이다. 정원은 대개 울타리와 그 울타리가 에워싸여진 공간에 구성되는 무엇들을 말한다. 그리고 정원을 가꾸는 이들에게 있어 그 구성원리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자 우주이다. 일본의 정원양식의 하나인 ‘가레산스이(枯山水, 마른산수)’처럼, 동양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산수(山水)’가 동양의 정원에서는 주된 콘텐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사는 사회를 연상하게 한다. 사고를 더욱 확장하여 되짚어본다면 정원은 인간문명을 형성과 함께한 도시의 구조와 유사하며 작동원리 또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유기적 구조의 클러스터들이 모인 형태로, 군락생활을 하는 인간사회와 다를 바 없다. 다시 정리하여 말한다면, 작가는 비가시적인 추상적 개념의 형태인 ‘사회’를 ‘정원’이란 물리적 공간으로 전유(Appropriation)하고 있다. 또한 ‘사회’와 ‘정원’은 상반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상반된 지점을 꼬집어내어 개념을 정리한 후, 이른바 ‘제명행위(題銘行爲: 명승지에 자신의 감상과 이름을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를 통해 경험적 장소로 치환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일군의 신작시리즈는 근대 신문기사들의 이미지를 새긴 설치 조형물들로써 이종의 ‘제명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0×30 크기의 보도블록을 연상시키는 석화 모형된 입체작품들로, 기존의 건식벽화 방식이 연장되어 적용된 36개의 입체작품이다. 자연스레 연출된 촉각적 표면으로 인해, 작업들은 마치 고대유물들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던 100여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 신문들을 살펴보면 나이브한 이미지의 광고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개화기 시절 그 당시 사회는 자본주의 파고를 직격으로 맞으며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생활양식의 급진적인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들은, 항상 유사한 사회적 현상은 되풀이되고, 내부의 비가시적인 사회적 구조들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민인 일자리 문제, 물질에 대한 욕망, 여성의 사회지위문제, 영어교육열풍, 금융과 부동산 등, 이와 같은 사회현상들의 반복은 결코 사회적 구조가 변화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누구나 정원을 소유할 수 있지만, 자신만의 가치가 투영된 ‘장소’로서의 ‘정원’으로 가꾸어 나가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떠한 방식을 빌려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해야 하는가? 일방으로 경도되지 않는 가치중립성을 견지하는 ‘장소’로서의 사회 구현은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내는 것은 자못 쉽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의 변화된 작업태도에서 의미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신시호, CAN Foundation Cur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