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주리의 작업에 관해 ‘다시’ 쓰게 될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미리 말하면, 이 글은 완성된 작업을 보지 못한 채 쓰인다. 그 이유는 누군가의 게으름이나 시행착오, 준비 부족 따위가 아니다. 김주리의 작업은 가장 완벽한 상태에서 허물어지길 결정해 왔고, 그 무너짐을 숙명으로, 방법이자 과정으로 지속, 반복돼 왔다. 작업은 고정된 상태가 아닌 완성하고 허물어지는 ‘순환’의 과정을 의도했다. 다시 쓰는 이 글 역시 그렇게 완전히 알 수 없는 상태를, 무너지며 솟아오르고 만들며 사라지는, 하지만 결코 사멸하지 않는 이전과 이후를 덧대고 교차시킨다.
김주리 개인전 《물∴산 Matter Ridge》의 제목은 위 언급한 생성과 소멸의 운동을 비교적 명확하게 지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날카롭게 정조준하기보다, 작가의 작업처럼 순환의 풍경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독해된다. 작가의 설명을 빌리자면, 제목의 ‘물’은 물질(物)과 흐르는 물(水)을, ‘산’은 솟아오르는 산(山)과 자라나는 상태(産)를 함께 가리킨다. 만약에 전시 제목을 한자 세로쓰기(종서)로 표기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줄을 넘겨 읽는다면, 산수(山水)나 산물(産物) 등으로도 풀이될 것이다. 얼핏 간단하고 직접적이지만 여러 독해가 가능한 제목은 어떤 면에서 암호와도 같다. 실제로 작가는 ‘물’과 ‘산’ 사이에 기호를 추가하며 마치 암호를 쓰듯 제목을 표기한다. 그 표기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묻지 않기를 택했지만), 그것이 전시의 ‘물’과 ‘산’을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아닌, 모종의 거리와 관계 안에 위치시키는 건 분명하다.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물산’의 개념/물질/상태는 어렴풋이 아득하게 사라지는 ‘물산’(沕散)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쓴 제목을 굳이 한자를 풀어보고, 그 사이 기호에 생각과 말을 더해보는 이유는 작가의 작업이 흙이라는 원초적 물질로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한다는 게으른 해석을 경계하고 싶어서이다. 어쩌면 흙과 물을 더 멀리 순환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일지도. 흙으로 만든 작품들은, 작가의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제법 근사할 것이며, 본질적이고 시원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추상화된 물질과 형태로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한, 아무 생각 없이 한적하게 머물며 감상하는 작업쯤으로 보면 곤란하다. 우리는 이 근원의 감각에 보다 적극적으로 또 면밀하게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무엇을 관통하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여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비록 그것이 어렴풋이 아득하게 사라지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저 고대 유적지의 잔재 같은 작업 이면에 자리하는 죽음, 기억, 퇴적, 이행의 면면을 협소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김주리 작업의 근원적 개념/물질/상태는 모종의 거리와 관계 안에 자리한다. 전시(장)의 매우 특수한 사건, 공간, 인간(들)과 함께 완성되고 사라지는 작업을 조각가의 단순한 미적 열망으로, 혹은 추상화된 물질로 감각하기보다 그 물질과 순환의 장면에 내재된 동시대적 관계성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몇 개의 ‘흙덩어리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흙덩어리의 상태는 그 자체로 근원적이고 원초적이다. 마치 봉우리처럼, 무덤처럼, 또 기념비처럼 세워진 (혹은 무너지고 있는) 이 덩어리들은 이번 전시에서 물리적으로 또 개념적으로 제법 넓은 공간을 점유한다. 흙에 물을 섞어 반죽한 뒤 단단하게 뭉쳐낸, 단순하고 꾸밈없는 과정에 작가의 작업 전반을 가로지르는 물질과 방식, 개념들이 포개진다. 가장 먼저, ‘퇴적과 침식’을 말해볼 수 있다. 작가는 미리 제작한 틀에 반죽한 흙을 붓고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눌러 형태를 잡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얇은 ‘지층’을 계속해서 ‘쌓으며’, 또 필요에 따라 일부를 ‘깎으며’ 각각의 덩어리들을 만드는 것이다. 일종의 퇴적과 침식작용을 환기하는 과정은 역시 흙과 물을 통한 과거 작업들, 일테면 <모습某濕>(2020-)과 <휘경揮景>(2009-)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가 끝나면 다시 무너져 흙으로 되돌아갈 게 분명한 작업들은 순간과 지속을 겹치며, 순환의 일부로서 존재의 생성/소멸을 묻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흙과 물, 그리고 인간(신체/노동)을 생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동시에 모든 것을 무화하는 양면적 존재로 인식하는 작업은, 세상의 기본 원리를 체현한 듯하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존재 근원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촉발시킨다. 누군가는 이 원초적 직관에 휩싸여, 물과 흙이 인류의 기원과 함께했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가 흙과 물을 섞어 인간을 빚는 장면, 혹은 흙과 신의 피를 섞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연상할 수도 있다. 흙이 창조와 전이(transformation), 죽음의 장소였으며, 삶의 구체성과 생명력을 작동시킨다고, 그렇게 이 세계에 감각을 부여하고 존재를 퇴적하고 침식시키며, 생의 순환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강한 직관으로 다가오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이 근원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다시 순환시켜 볼 수 있을까. 작업의 재료와 방법에서 목격되는 생성과 무너짐, 침식과 퇴적의 과정을 정박되지 않는 근원적 움직임으로, 보다 넓은 맥락으로 확장해 볼 순 없을까. 전시장의 흙덩어리들은 작가의 최근 전시 《흙진주》(보안여관, 2025) 《무덤들》(뮤지엄헤드, 2024), 《서울식》(스페이스애프터, 2024)에서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평면도 모양을 본뜬 틀로 조형된다. 작가는 여러 장소에서 수집, 취득한 흙을 도시 개발의 상징과도 같은 아파트 단면 모양으로 뭉쳐내며 소멸의 흔적 혹은 그것의 망각을 다시 형상화, 물질화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최근의 <Column>(2024-) 시리즈뿐 아니라 초기작으로까지 연결된다. 다시 말해, 최근 작업에서 ‘흙’이 직관적으로 상기시키는 근원적, 절대적 성질은, 당장의 재현과 시각적, 촉각적 인식을 넘어서 다층적 시간성을 함축하고 또 매개하려는 작가의 오랜 시도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과거 작업을, 일테면 위 언급한 <모습>과 <휘경> 시리즈를 다시, 그리고 조금 다르게 호출해 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 서울 휘경동 재개발을 경험한 작가는 <휘경> 시리즈에서 실제 건축물을 리서치하고 흙으로 빚어 섬세하게 재현한 후, 전시 직전, 물을 부어 무너뜨리며, 물·흙·중력으로 일어나는 붕괴를 당대적 풍경으로 제시한 바 있다. 서서히 침식·붕괴되는 압축된 시간 속에 사라지는 삶의 장소와 흔적을 이중적 상태와 함축적 이행으로 응시하게 했다. 이 압축된 시간과 구체성, 그리고 추상화된 자본주의의 공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오히려 더욱 빨라진—생성과 파괴의 과잉축적을, 그리고 그로 인한 빈곤을 환기한다. 작업의 대상이었던 휘경동은 여전히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지만, 그 지층은 반복된 재개발, 철거, 건설, 이주의 과정을 통해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이전과 다른 결로 퇴적되었다. 골목과 주택은 사라졌으며, 새로 들어선 아파트는 작가가 빚어낸 순환의 시간을 초과했다. 그곳에서 흙은 기억이나 기념이 아닌 건축 자재나 부동산 용어쯤으로 치환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남동 일대, 이 글이 쓰이고 있는 어느 동네, 전시장을 찾는 누군가의 주거지를 포함한 서울 전역, 나아가 전 지구적 상황으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창가 앞에 자리한 <물산03>(2025)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다세대 주택과 아파트 단지들이 이전 작업에서 보인 리얼리티의 이중적 귀결을 함축하는 장면이자, 모두의 일상 속에 자리하는 보편적 광경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김주리 작업의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성질을, 다소 강박적이었던 재현 이후, 한 시대의 모형과 그 특수성이 물에 녹아서 사라진 이후로, 혹은 그것들의 퇴적과 침식으로 다시 사고해 본다. 도시 개발의 장면들을 꽤나 직접적으로 경유한 이전 물질(흙과 물)의 역할은 이제 특정 지역이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전 지구적 도시 풍경의 공통된 생리와 맞닿는다. 과거 작업이 보여주었던 세부적인 리얼리티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며 근원적 시간성을 구현하는 최근 작업으로 또다시 응축, 확장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전시의 풍경은 하나의 역사적 장면처럼 혹은 오래된 기원처럼, 음울하지만 너무나도 보편적인 장면처럼 제시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흙은 작업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또 다른 퇴적의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거듭되고 있는 개발의 장면들을 저 멀리 떠올리게 하는 한편, 순간의 변화나 단순한 결정에서 비롯되지 않는 오랜 시간의 퇴적, 그 안의 무수한 관계와 실제 사건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흙/덩어리’로 다가온다. 벽에 걸린 <clay tablet: Seoul-style>(2025), <desert>(2025) 시리즈 역시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물질과 기억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흙과 물이 함께 응고된 표면은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자연적 소멸의 장면을 체화한 듯 보인다. 때로는 퇴적층을 절단해 드러낸 단면처럼, 표면에는 생성과 소멸이 교차하는 미세한 균열과 흔적이 자리하기도 한다. 관객은 이 앞에서 모종의 절대성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한순간의 포착과 현실적 재현이 아니라, 사라짐과 지속, 변형과 보존이 긴 시간을 함축하여 맞물린 장면이다. 물질은 기억이 서로를 지탱하며 만든 단면으로 드러나며, 마주 보는 절대적 시점 안에서 비가역적인 흐름을 감각하게 한다.
위에서 설명한 물과 흙, 시간의 관계성을 장소·물질·도시·사회 일반의 차원을 넘어 동시대 미디어 환경과 인지 전반으로 확장해 본다면 어떨까. 물질적 기반 위에 형성된 기억과 시간의 감각이 어떻게 또 다른 형태의 축적과 소멸, 변형과 보존의 과정과 맞닿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주리 작업의 ‘물과 흙’은 감각과 인식의 구조를 재편하는 매개로서, 동시대 인지 환경 속으로까지 그 작용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 작가는 《일기(一期)생멸(生滅)》(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17), 《빈 페이지》(금호미술관, 2017)와 같은 전시에서, 흙과 물이 만나 만들어낸 <휘경>의 풍경을 보다 추상적인 사유로 확장한 바 있다. 이들 작업에는 여러 장소, 환경, 소리, 오브제, 미디어 등이 기억과 시간의 대체물로 호명되었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미디어의 확장적 인지를 모색했다는 전제하에, 김주리의 ‘퇴적’에 대한 관심은 디지털 이미지·네트워크·데이터가 형성하는 비물질적 축적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주요 모티프인 ‘흙과 물’은 단순한 조형 재료를 넘어 그러한 미디어 조건/환경의 은유가 된다. 유튜브와 셔터스톡, 그리고 수많은 이미지 축적 웹 플랫폼이 말 그대로 일상이자 자연으로 자리하는 오늘, 기억의 퇴적작용은 조금 다른 각도와 지평에서 사고될 수 있다. 작가의 과거 작업에서 목격되는 주택들, 담벼락, 비탈길의 모습은 오늘 유튜브 영상 클립과 인터뷰, 블로그 사진 등에 남는다. 사라진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건, 그 시절을 ‘보게’ 하는 건, 어쩌면 물질의 흔적이 아니라 이러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서일지도, 그렇게 퇴적은 땅 밑에서만 아니라 서버 안에서 작동하는지 모른다. 바꿔 말하면, 김주리 작업에서 감각되는 ‘흙’의 ‘퇴적’ 작용은 반드시 물질만이 아니라 가상의 재생 가능한 퇴적, 다시 보기 가능한 기억의 형상화된 입자 단위들, 시간, 장소, 맥락을 캡슐화하여 보존하고 배포하는 메가바이트의 네트워크와 클라우드를 환기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김주리 개인전 《물 ∴ 산 Matter Ridge》에서 마주하는 흙과 물을 단순한 물질성이나 원초적 직관에만 정박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파헤쳐지고 무너진 잔해, 덮인 뒤 그 무엇도 증언하지 않는 침묵, 재현 불가능한 환상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물질이 있다. 전시가 말하는 ‘물산’은 물질의 위상과 권위, 그리고 인지를 다각도로 사유하게 하는 상징이자 증거로 자리한다. 이는 퇴적이라는 행위를 지속시키는 상징적 메타포로 기능하며, 때로는 퇴적의 다양한 경로 속에 잠복해 생성과 소멸의 표상을 환기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지식과 경험의 집합적 형상, 기억의 축적물로서 ‘퇴적층’을 형성하며, 더 넓게는 부패하지 않는 죽음, 끊임없이 흔적을 저장하되 무감각한, 비유기적 동시대 미디어의 인지까지 연루시킨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흙덩어리는, 물질을 직접 바라보고 만져 본 몸과 시선, 그리고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은 개념과 철학, 이미지와 미디어가 층층이 퇴적된 광의적 형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그렇게 《물 ∴ 산 Matter Ridge》의 흙과 물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증거하는 형식으로 남겨본다. 전시의 작업은 단일 미디어가 담지 못하는 감각적 여백을 상징하는 잔존의 물질이 되기도, 말소된 것들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감각이, 퇴적이라는 행위가 본래 무엇이었는가를 되묻는 역설을 구성한다. 어쩌면 김주리의 작업은 그 역설의 순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사라짐 속에서 퇴적을 이루는 일련의 과정은 얼핏 단단해 보이는 지층, 그 바탕과 형상의 구조가 변형 가능한 가소적 상태임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가소성은 물질의 원초적 직관을 횡단해 오늘날 기억의 지층과 퇴적/침식의 감각, 그리고 물질의 위상과 미디어 작동 방식을 재고하게 한다. 다시, 작업은 과거의 보존물이 아니라, 감각과 시간, 기억의 정치학이 교차하는 현장이 된다. 사라진 것의 증거이자, 여전히 생성 중인 장면으로, 오늘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퇴적할 것인가를 묻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다가온다.
협력 기획 권혁규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