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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그곳엔 단번에 정의 내리기 어려운 낯섦이 서려 있다. 따뜻한 것인지 서늘한 것인지 그 빛이 석양인지 여명인지 혹은 달빛인지 도무지 확실한 것이 없다. 도착한 이는 그저 예감할 뿐이다. 전시가 작가의 사유를 ‘예감’하는 일이라고 할 때, 관객은 고요히 작품을 따른다. 김재유의 그림 앞에서 감각은 관념이나 언어보다 먼저 도착한다. 감각적 경험은 실재를 구성한다. 김재유 개인전 《구름과 오아시스 Clouds and Oasis》는 색과 질감이 된 경험에 관한 전시이다. 김재유는 그간 ‘Slippery Mountain’(2024~) 연작, ‘드러나 있으면서도 숨겨진 그곳’(2019~) 연작 등을 통해 풍경에 대한 관심을 회화로 변환하고, 빛을 물질로 붙잡기 위한 탐구를 해 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속해 온 장소와 기억, 그리고 이에 공명하는 시간 감각을 덧대는 회화적 시도의 연장이다. 표면을 살피는 눈과 물질을 느끼는 손에 대한 사유를 중첩한 결과물로서의 회화는 질감, 층위, 두께를 경유해 가시화된다. 관람자는 표면에 남은 손의 감각을 더듬으며, 회화가 이를 어떻게 현전하는지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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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그림(〈Somewhere, Eternal〉(2025))이 이끄는 풍경 안으로 들어가 보자. 전시장 내 가장 긴 벽의 맞은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긴 창이 정원을 비추고 있다. 벽에 준하는 창은 화이트큐브의 개념적 의미를 흔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전제로 세워둔 가정이자 모종의 합의, 규범이 해제된 공간은 창이 허락한 빛, 자연의 색과 풍경의 개입을 받아들이기를 종용한다. 김재유의 작업이 다름 아닌 빛과 풍경을 다루고 있기에 공간의 조건을 전시의 맥락으로 끌어들여 보기로 결정한다. 그림이 걸려 마땅할 자리를 차지한 대가로 대리자로서의 책무를 쥐여주기로 한다. 〈얼룩이 머문 흔적인가, 창에 비친 하늘일까〉(2025)는 창 모서리를 따라 풍경의 경계에 자리한다. 눈여겨 볼 것은 붓질을 향한 “얼룩”이라는 호명이다. 빛을 붙잡고자 했던 그림에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 작품명은 작업이 갈망하는 그것이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대상이었음을 그 역시 예감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빛을 담을 수 없다면 조건을 바꿔보고자 야외 설치를 실험한다. 캔버스에 빛을 담고자 했던 장구한 역사 속 시도를 파고든다. 〈해를 쫓는 손〉(2025)이라는 제목에서 예감 가능하듯 화면에 빛을 담는 대신 (장소로서의) 빛 안에 그림을 담는 일종의 실험이다. “해를 쫓는 손”은 이를 위한 작가의 무구한 헌신이다. 이때 큰 창은 또 하나의 캔버스로 기능하고, 그림은 비로소 경험 가능한 ‘장소’가 된다. 문을 열고 풍경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관객에게 전시와 그림을, 그러니까 존재와 현재를 경험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작업 이야기를 해보자. 《구름과 오아시스》에서 작가는 원예용 스펀지의 상표명인 ‘오아시스’를 활용해 손으로 쌓고, 긁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행위의 감각을 캔버스로 옮긴 작업을 선보인다. 이는 그간 집중해 온 ‘응시의 감각’이 ‘접지(接地)의 감각’으로 나아가는 주요한 전환점을 마련한다. 오아시스를 만지던 촉각은 캔버스로 이어지고, 되새기고자 했던 기억은 작업실로 드리운 빛과 그림자와 겹쳐지며 화면을 이룬다. 이제 표면은 촉각 좇는 미메시스이자 물질 그 자체로서 우리 앞에 실존한다. 어느새 화면은 표면 너머 사유를 비춘다. 작가는 무한의 시간 속에서 마침내 마주했던 건 빛을 좇고 기억을 더듬던 순간으로부터의 해방, 온전한 현재와의 조우였음을 고백한다.
전시는〈오아시스 프로타주〉(2025)와 〈그라운드〉(2025) 두 점의 대형 회화를 축으로 삼는다. 가로 2.5미터의 규모가 주는 물리적 압도감 때문만은 아니다. 오아시스에서 비롯된 작업이라는 점에서 출발해 보자. 여기에서 작업이 말하는 프로타주는 ‘표면의 모사’가 아닌 ‘감각의 전이’로, 김재유의 새로운 화면을 읽는 단서로 기능한다. 화면은 확정적 형태의 경계,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시간 바깥의 풍경”에 머물며 부유하고, 눅진한 질감으로 표면에 달라붙은 붓질은 ‘어떤 장소’의 징후가 된다. 이는 캔버스를 그라운드 삼아 움직였을 작가의 자취를 생각하게 하고(〈손의 기억〉, 〈만지듯 그린다〉(2025)) 이토록 섬세하게 벼려온 감각을 왜 큰 붓이나 손 등으로 뭉툭하게 표현하는지, 눈앞의 축약된 무보(score)의 당위를 고민하게 만든다(〈뾰족한 표현을 하지 않는 일〉, 〈투명한 공기〉(2025)). 그라운드의 근원을 찾기 위해선 이른바 ‘계획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형성된 작가의 시각성을 톺아볼 필요가 있겠다.
정갈하게 구획된 도시와 반듯한 아파트, 내부까지 획일화된 주거 환경 속에서 명료해지는 삶의 경로들. 1990년대 조성된 1기 신도시에서 자란 작가는 ‘안락하게 조성된 것을 적절히 소비하는 감각’ 바깥의 익숙지 않은 풍경을 마주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아왔다. 매혹의 대상은 대개 인위의 반대에 있는 것, 자연의 상태 안에서 발견되고 이는 곧 그라운드에 대한 감각적 이끌림으로 수렴한다. 이 매혹과 압도는 예측 가능한 매끈함에서 벗어난 고유성을 찾고자 하는 몰입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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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오아시스》는 회화를 표면이 아닌 장(field)으로 다룬다. 붓질은 형상을 산출하기보다 지각의 전제를 드러낸다. 그 장 안에서 장소, 기억, 시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전시는 내용을 해독하라는 요구를 유보하고, 감각의 형식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판단과 의미는 지각이 재조정되는 그 자리, 화면이 품은 감각으로부터 생성됨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전시에서 ‘구름’은 붓질이 이루는 표현에 대한 먼 비유로, ‘오아시스’는 물질을 느끼는 손이자 회화적 지반에 대한 가까운 은유로 작동한다. 그리고 ‘구름과 오아시스’는 그 앞에서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