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영토 Territory of Emptiness
그림은 공백으로부터 태어난다. 심상은 부재와 상실마저도 그려내고, 빈 곳을 견디지 못하는 생각들이 공백을 메워보려 시도할 때, 나에게 내재된 감각들이 무엇이었는지 꺼내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오래전 폐의 일부를 절제한 이후에도 사라진 자리에서 통증이 감각되는 경험을 했다. 공백으로 인해 오히려 몸을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된 것이다. 감각은 상실되는 대신 새로운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청각과 촉감, 부재를 통해 비로소 깨게 되는 생경함처럼 말이다. 이건탁은 개인적인 경험을 시작으로 신체보다 더 커다란 감각이 있음을 발견하고, 공백을 가능성의 통로로 삼아 그리기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공백의 영토》는 상실과 부재로부터 비롯된 감각들을 한계 없이 꺼내어, 근원과 실체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하는 감각의 지형을 탐험한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 느낌은 감정일 수도 있고, 설명하기 어려운 은은한 통증일 수도 있다. 느껴질 뿐 보이지는 않고, 때로는 신체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듯 거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몸에 축적된 감각은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느끼게 하기도 한다. 회화가 그리기를 통해 내면의 풍경을 발현하는 것이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영토는 어떻게 실현되고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뿌리처럼 내재되어 있던 장면들이 작가의 움직임을 통해 화면으로 드러난다. 실체가 없지만 몸 어딘가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는 감각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자꾸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들, 그리고 꿈처럼 제한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들을 끊임없이 그려본다. 가령, 꿈속에선 알고 있는 것들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이 물질적인 존재들보다도 더 생생하게 움직인다. 생경하고 어색한 장면에 다다른 후 깨어나면 그제서야 그 모든 것들이 꿈이었고, 발생한 적도 없는 일들을 체험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현실의 시간을 확장하는 꿈처럼, 물리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꿈을 통해 신체를 투과하는 감각들을 목격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실체를 갖지 못하는 동안 이건탁은 그러한 감각들을 회화로써 현존하게 한다.
이건탁의 그리기는 신체에 대한 느낌을 파악해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에는 머리, 몸통, 팔, 다리와 같은 신체의 형상을 그리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몸의 형태를 재현한다기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감지되고 체험되고 있는지를 그리기를 통해 이끌어내 본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풀어지는 근육의 움직임과, 감정에 따라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간지럽고 우련한 통증을 떠올려 보자. 계절과 공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피부의 느낌은 어떨까. 감각은 몸속 이곳저곳에, 아무런 기표 없이 스며들어 있다. 이건탁은 형언할 수 없고 때로는 부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회화를 통해 현실로 당겨온다. 시작점처럼 그려지는 구체적인 신체 형상은 작가가 감각에 의존해 화면을 전개함에 따라 점차 역동적이고 표현적인 그리기로 확장된다. 커다란 화면이 몸짓을 가능한 한 크고 유연하게 뻗을 수 있게 한다. 해부학적인 이해와 형태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터득한 감각을 따라가며 신체를 그려본다. 선과 면이 축적되면서 신체의 형상은 희미해지고, 점차 추상적인 화면으로 이어진다. 어렴풋해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을 필치를 통해 가능한 한 모두 쏟아내고, 어느 정도 화면이 채워지면 직관적인 감각으로 화면을 정리해 본다. 즉흥적인 필적 위로 지도를 그려나가듯 적당한 물성과 두께, 그리고 색을 더해나간다. 엉킨 실을 풀고 화면의 균형을 잡듯 면을 채우고 작은 형태들을 더해나간다. 드로잉 하듯 시작된 그림은 어느덧 촘촘한 밀도의 풍경에 다다른다. 이건탁의 회화는 신체를 감각하는 데서 시작해, 이어지고 투과되는 감각의 궤적을 선과 면으로 쌓아 올리며 온전한 그리기의 태도로 나아간다.
이건탁은 그리기를 실천함으로써 막연하게 느껴지던 감각들을 눈앞에 꺼내어 놓는다. 그림의 제목처럼 그것은 황혼이나 풍경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말이나 감정을 붙잡고 있었던 기억이나 차고 뜨거운 공기처럼 차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무엇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모호함 안에서 헤매며, 명명되지 않아 오히려 무한해지는 세계를 탐험해 보기로 한다. 본능적으로 그리는 동시에 그것이 온전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지 사유하는 태도를 통해, 몸 안에 압축되어 있던 세계를 회화라는 무한한 영토에 풀어놓는다. 몸짓과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감각에 의존하며 미지의 세계를 펼치고, 그것이 회화라는 물성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떠한 형태로 거듭나게 되는지 지켜본다. 아이를 키우듯,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을 다해 그림을 그려나간다. 공백을 설명으로 채우기보다는, 원래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한다. 어느덧 그림은 떠다니던 감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세상이 말과 글로 채워지기 전에, 아이들은 보고, 만지고, 쥐고 놓치며, 낱말들 대신 체득된 형태 없는 언어들을 통해 세계를 알아나간다. 보편적인 언어가 그 자리를 대체해도, 여전히 가시화할 수 없고 해석될 수 없는 기척들이 있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순수한 언어를 복기해 보는 일이 아닐까. 이건탁은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그러한 기척들을 추적한다.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그리기 속에서, 내재된 감각의 단서가 되는 조형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감각들을 다시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나간다. 그리기에 대한 사유는 또 다른 그리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과정들은 그림의 갈래를 한 지점으로 좁히기보다는, 감각이 온전히 회화로 드러났는지 점검하기 위함일 것이다. 공백은 보이지 않는 언어들의 거처이다. 신체보다 더 큰 감각을 감지하고 그려나가는 작가의 실천은 공백을 결핍으로 폄하하지 않고, 바닥없는 물¹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채 영원히 흐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