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소영큐레이터
김성수 작가의 작품에는 예측 가능성이 없다. 과거 작품에서 현재까지 한 작가 작품이 맞을까 의심될 만큼 작품의 표면적 형상은 상이하다. 하지만 그 안에 들여다보면 결국 작가는 일관된 목소리로 사회 이면의 인간을 대변한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시절, 작가는 한국과 다른 유럽의 건물에 매료된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바라본 유럽은 곁을 내어주지 않는 차가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비단 유럽뿐이었을까. 잠시 머문 한국에서조차 또 다른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는 한국의 무역센터에 연결된 수없이 많은 건물의 선과 프랑스 루브르Louvre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영감을 받아 ‘메탈리카 Metallica’ 시리즈는 탄생시켰다. 스페이스 캔 1층 전시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도 메탈리카 시리즈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곧게 뻗은 직선과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철골 구조는 획일화된 도시를 살아가는 현실의 실제적 구상이자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또 다른 추상의 형태를 담는다.
두터운 건물을 상징하는 가벽을 지나면 김성수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 중에 하나인 ‘멜랑콜리Melancholy’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우울한 감정’을 나타내는 프랑스어 멜랑콜리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자 가상의 인물이며 현대인의 초상이다. 기록되지 않은 텅 빈 배경 속에 남겨진 인간의 공허한 눈빛은 화려하게 펼쳐진 메탈리카의 확장성을 순식간에 끌어당겨 심연의 공허함을 담아낸다. 무한히 이어지는 거울을 통해 관람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멜랑콜리 작품은 사회 이면에 소외된 인간 자신을 살펴보게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주하는 페르시아 문양의 작품은 김성수 작가의 ‘바니타스Vanitas’ 작품이다. 성경에 기록된 전도서 1장 2절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는 말이 전해진다. 이 말에 등장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인간의 유한함과 풍요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문양이자 당시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문양을 대표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과욕과 욕망을 대변한다. 전시 제목에도 등장하는 바니타스는 단어의 의미 자체로 김성수작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바니타스 작품에 드러난 화려한 금빛의 바래진 빛깔은 지나간 화려함과 그 뒤의 남겨진 허무함의 상징인 것이다.
과거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꽃은 시들거나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조화를 대상으로 하였다. 생명이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정교한 묘사를 통한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작품은 화려한 욕망과 금새 시든 꽃의 공허 사이를 표현하였다. 작가의 신작 ‘석화lapidifier’도 이런 꽃의 연장선에서 탄생하였다. 금색의 화려했던 순간의 치열함이 탈락되고 굳어진 꽃은 아름다움이 사라진 꽃의 흔적이자 머문 욕망의 허탈함이다.
오래된 집으로 이어지는 석화 시리즈는 긴 시간의 역사를 담아낸 한옥 공간안에서 꽃 피운다. 기술과 기교가 더해질수록 아름다움은 반감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오래된 집 석화 시리즈는 꽃의 잔존과 생존 사이에서 인간의 생을 발견한다. 덜어지고 비워지다 못해 흔적만 남은 꽃의 형태는 커다란 봉우리를 받치고 있는 여린 꽃의 줄기만큼이나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한다. 스페이스 캔 석화에서 보던 금빛이 사라지고 색의 흔적이 대신하는 오래된 집의 석화는 세월의 기억이 경험으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반짝이는 세월의 금빛을 잃고도 지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을 닮았다.
김성수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그동안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이 머문 자리의 빛 바랜 허무함과 공허함을 표현한 이전 작품에서 나아가 생의 허무함 속에서도 세월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변화는 삶이 허무함 속의 좌절만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을 꽃 피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래된 집 전시 마지막에 놓인 작가의 다음 신작을 예고하는 ‘달Moon’ 시리즈는 이런 희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상의 치열한 삶이 끝나고 이어질 곳 혹은 이미 존재할 제3의 공간에서의 삶은 공허보다는 찬란함으로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