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훈

세계내 회화
(…)
이들의 작업을 획일적으로 추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재현으로부터 멀어져 대상을 해체하거나 감각과 표현에 무게중심을 더 두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안상훈의 작업 역시 구체적인 지시 대상 없이 불규칙적인 필치로 화면을 가득 채웠는데, 이처럼 화면 구성이나 회화적 자율성에 매진한 회화는 이미 20세기 레퍼런스들의 과업이다. 우리는 20세기 레퍼런스들을 경유하여 21세기의 활주로에 서서 20세기가 겪은 비판으로부터(1) 자유로운 채 모든 것을 만끽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더 새롭게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문할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과거와 정반대이거나 과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또 레트로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회의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보리스 그로이스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사회경제학 측면에서 분석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 그의 관점으로 보면 지금의 회화에서 새로움이란 문화적 가치전도의 측면에서 융기하는 것이 된다. 그로이스는 작가(저자)도 철저하게 문화경제적 논리에 내맡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문화, 경제 전반에서 레트로에 의한 문화적 가치절상이 이뤄지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중이다. (…) 회화로 본다면, 추상의 재소환이라고 하는 동시대의 회화적 (일부) 전략 속에서 개별 작가는 어떠한 개인적 해석과 선택을 내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고양 레지던시에서 안상훈의 작업을 처음 대면했을 때 캔버스 화면 위에서 관찰되었던 몇 가지 특징 외에 감지되었던 어떤 생경함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다채로운 색과 현란한 붓질이 가득했던 그의 캔버스는 언뜻 많은 내용물이 뒤섞인 하나의 그릇 같았지만, 볼수록 그의 그림은 일정하게 재단된 캔버스보다 더 넓은 면에 익숙해져 있는 작업이었고, 이미지들 역시 캔버스 프레임 안에 안착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수학적 평면 개념이 제한적 크기의 면이 아니라 공간상의 무한한 면으로 정의되는 것처럼 그의 회화가 상정하는 면은 프레임밖 세계로 확장 가능할 것 같았다. (…) 특히 그가 종종 캔버스 대신 투명한 비닐 장막을 지지대로 사용한 것은 투명막 너머로 투영된 세계 그 자체를 회화적 지지대로 삼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들은 공간 속에서 사방으로 밀고 끌어당기는 힘을 받는 이미지로 존재하며 구부러지거나 휠 수 있고 펄럭일 수도 있다. 평면성의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공간상의 탄력과 확장성을 체득한 작가의 제스처는 일정 크기의 캔버스 화면 위에서도 공간의 볼륨을 상정하고 붓질을 시작한다. 이 붓질은 공간상의 벡터처럼 화면을 뚫고 들어가기도 하고 비스듬히 가로지르기도 한다. 이것이 하나의 평면으로만 보이는 이유는 캔버스를 정면에서, 즉 한 방향에서만 봐야 하는 시감각의 한계다. (…)

(1)일례로,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 이후」(1962)라는 글에서, 윌렘 드 쿠닝 등 일부 작가의 그림이 환영과 묘사를 통해 어떤 재현적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며 이들 추상회화의 역설을 비판하기 위해 ‘정처 없는 재현(homeless 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할 포스터 외 지음, 배수희 외 옮김,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서울: 세미콜론, 2007), p.439).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입주 작가 비평 모음집」에 수록된 글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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