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서 사건을 보는 눈

김홍중(서울대 사회학과)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런던 템즈강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 뾰족한 첨탑에는 (가령 교통사고 같은) 사건 특유의 ‘일회성’이나 ‘돌발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무언가로 보일 뿐, 갑자기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우리 시각의 이 환상을 교정한다. ‘템즈 강변에 오벨리스크가 있다’라는 사실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 사태다. 지구가 아직 생성되지도 않았던 시기라면 저 문장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그저 불가해한 명제였을 것이다. 2천 만 년 전 템즈 강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1870년대 초반 화이트헤드가 아직 어렸을 적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오벨리스크는 1877-8년에 비로소 알렉산드리아에서 런던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템즈 강변의 오벨리스크는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있게 된’ 사물이다. 그것의 ‘있음’은 한시적이고, 일회적이고, (장구한 시간 속에서 보면) 돌발적이다. 게다가, 그 건축물은 사실 매 순간 약간의 분자를 잃어가는 변형적 생성 속에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벨리스크는 발생하고 있다. 존재는 사건이다.

박신용의 작업 『Daebu-Construction, Archive』를 보면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한 자락이 생각났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시간에 의해 깊이 침투된 채, 사건성에 붙들린 띤 채 나타나고 있다. 존재자들을 담는 텅 빈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그들의 배치와 얽힘 속에서 출현하여 건축(구성)되고 폐기(해체)되는 하나의 생명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2019년에 대부도 공사 현장들과 시화호 근처를 답사하면서 유령적 장소들을 탐색했다. 그 현장 풍경의 사진 아카이브에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이 실려 있다. 고대 유적처럼 보이는 버려진 건물들, 건축 중인 펜션 타운, 불길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광대 조형물, 중학교와 고등학교 공사 현장, 호수 주변에 자생한 키 작은 관목들, 잡초가 돋아나고 균열이 간 낡은 도로, 섬과 갯벌의 황량한 풍경, 돌무덤, 매립지 위로 조성된 귀화 식물들의 정원, 솟아오르는 뉴타운 아파트들, 텅 빈 운동시설 (…).

잘 알려진 것처럼, 대부도는 개발주의 시대에 간척 사업을 통해 선감도, 불도, 탄도 같은 섬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조립된 공간(assembled space)이다. 우리에게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했으리라 여겨지는 대부도라는 섬은 사실 역사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제작된 장소임 셈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꿈과 욕망을 재료로 건설된 공간이며, 동시에 그 꿈이 파상(破像)되고 남은 환멸의 자취들 속에서 변형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장소’다.

작가가 찍은 대부도 풍경들은 대개 버려진 곳, 방치된 곳이다. 작품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가만히 응시해 보면, 쓸쓸하기도 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쓸쓸함은 인간의 부재에서 오지만, 으스스함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활력, 작용, 운동의 미묘한 지각에서 온다. 달리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 으스스한 것은 그것이 부재를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무언가의 현존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이 사람에 의해 점유되고 사용될 때는 드러나지 않던 공간 그 자체의 존재감, 혹은 거기 깃들여 있는 인간-너머의 힘들. 이 힘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사진은 그 힘들을 이미지로 포획하여 보여준다. 인간이 공간에 스며 넣은 욕망이 다 새어나간, 메마른 시체처럼 앙상하고 삭막한 어떤 장소가 드러내는 낯선 이미지. 어떤 도구가 부서진 이후에야, 쓰임새가 소멸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 고유의 모습을 인간 시각에 나타내듯이, 텅 빈 공간성이 발산하는 감각적 순간들, 인간이 떠난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풍경의 물성(物性).

박신용이 ‘공사 현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공사 현장에는 건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보이지 않을 여러 요소들이 산적해 있다. 파헤쳐진 흙, 쌓여 있는 재료, 떠도는 먼지, 밤에도 들려올 것 같은 소음의 환각, 전선들과 비계(飛階), 공사장의 경계를 두르는 울타리, 혹은 가림막 (…). 이 잡다한 요소들이 아직 ‘건물’이라는 독자적 생명체의 유기적 기능에 수렴되지 않은 채 자신의 빛, 색깔, 소리를 발산하는 곳. 공사 현장은 그래서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세계관 혹은 방법론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한 존재가 사건으로 나타나는 장소 혹은 세계를 보는 특수한 인식론적 스탠스. 그 지점에서 보는 것들은 존재가 아니라 미시적 사건들의 분산과 배치로 현상한다. 거기에서 세계를 보면, 굳건하고 단단한 시스템이 미세한 구멍, 균열, 소멸 가능성에 의해 가로질러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리, 그 자리를 찾아가서 보는 것.

이런 점에서 박신용 작가의 시선은 우직하고 집요하다.

가령, 그는 2020년에 인천, 김포, 부산 등에 있는 쓰레기 매립지(landfill)라는 새로운 공간을 또다시 탐구했다. 공사 현장과 쓰레기 매립지는 흥미로운 대립각을 이루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무언가 구축되는 과정이 공사 현장이라면, 버려진 사물이 형체와 윤곽을 상실해가며 파괴되는 과정이 매립지의 시간성을 이룬다. 한쪽에 구성과 조립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부패와 소실이 있다.

『Wasted Land, Archive』에는 도시에서 폐기된 쓰레기들이 한 곳에 모여 처리되는 매립지와 그 주변 풍경에 작가가 던진 시선의 파편들이 실려 있다. 매립지로 가는 길, 삭막하게 깎여 나간 산, 자동차 길, 쓰레기에서 나오는 가스를 처리하는 탱크, 연못, 부대 시설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 더미들, 새벽의 쓰레기 산(山), 밤의 쓰레기 산, 플라스틱 쓰레기를 선별하고 분쇄하는 기계, 그 기계를 통과해서 나온 조각난 플라스틱들의 거대한 집적(集積), 재활용 센터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이 모든 이미지 속에서 하나의 특별한 대상이 사고와 관심을 요청하며 부각되어 온다. 그것이 바로 쓰레기다.

쓰레기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흄즈(Edward Humes)에 의하면, 연간 미국인들은 570만톤의 카펫, 862만톤의 스티로폼, 350억 개의 플라스틱 병, 400억 개의 일회용 플라스틱 칼, 포크, 숟가락, 450만 톤의 사무용 종이, 맨해튼을 다시 무너뜨리고 짓기에 충분한 양의 강철, 20년 동안 5000만 가구를 난방하기에 충분한 양의 나무, 텍사스 주를 랩으로 싸기에 충분한 양의 플라스틱 필름을 쓰레기로 배출한다. 미국인 한 사람이 평생 120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간다.

작가가 사진에 담은 매립지 풍경들은 이처럼 우리 시대 지구적 수준에서 막대한 양으로 버려지고 처리되는 쓰레기-현상의 한 일부를 이룬다. 박신용은 『Wasted Land, Archive』의 서문에서 자신의 작업을 추동한, 쓰레기에 대한 성찰을 적고 있다. “우리는 (…) 마치 죽은 생명체를 매장하듯 땅에 쓰레기를 묻는다. 땅은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땅은 다시 생명을 내어준다. 이는 땅이 가진 신성성이다. 소멸시키고 다시 되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묻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루가 되고 액체가 되고 가스가 되어도 여전히 남는다. 모양만 바뀔 뿐 쓰레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서문>).

작가가 인식한 쓰레기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땅을 이긴다는 사실에 있다. 땅이란 흙으로 뒤덮인 지구의 표면이다. 약 5억 전에 비로소 지구상에 형성된 흙은 풍화된 암석에 식물의 잔해가 섞여 오랫동안 형성된 토양(土壤)을 가리킨다. 생명이 없는 별에는 암석의 부스러기나 먼지의 층은 있겠지만, 지표의 30%를 감싸고 생성/분해의 드라마를 펼쳐내는, 그런 흙이라는 존재는 없다. 이처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흙이 발휘하는 분해력, 모든 것을 삼키고, 소멸시키고,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다른 형태의 생명을 틔워내는 ‘신성성’의 장소가 바로 땅이다. 그런데, 쓰레기는 이런 땅의 분해력을 초과하여 존재를 지속한다. 즉 쉽게 썩지 않는다. 쓰레기는 단순한 오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순환하며 작용하게 될 강력한 비인간 행위자들이 뒤엉킨 난마(亂麻)다. 쓰레기가 발휘하는 이런 역설적 생기력(vitality), 그 무시무시한 살아 있음과 작용력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가 제인 베넷의『생동하는 물질』에 다음처럼 인용되어 있다.

“(…) 쓰레기 더미는 살아 있다. (…) 그곳에는 어두운 무산소계(無酸素界) 밑에서 무성히 활동하는 수십억의 미생물들이 있다 (…) 어느 날 오후 나는 (…) 어떠한 쓰레기 더미 옆으로, 그러니까 뉴어크(Newark) 시의 폐기물로 빚어진 40피트 높이의 압축된 쓰레기 더미 옆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전날 밤까지 비가 내렸기에 적은 양의 침출수가 스며 나오기까지는, 더미의 경사를 따라 검은 액체가, 그 쓰레기의 에스프레소가 흘러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시간 내로, 이 액체의 줄기는 목초지의 지하수에 (…) 이르게 될 것이고, 독성을 지닌 줄기와 뒤섞일 것이다. (…)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 액체가 스며 나오는 곳은 순수한 오염 물질이, 기름과 윤활유, 시안화물과 비소, 카드뮴과 크롬과 구리와 납과 니켈과 은과 수은과 아연의 순수한 혼합물이 (…) 태어나는 곳으로 변모했다. 내가 이 액체를 건드렸을 때 나의 손끝은 푸르스름한 캐러멜의 빛을 띠었고, 곧이어 나는 그것이 따뜻하고 발랄하다고 느꼈다. 몇 야드 밖에서, 이 물줄기는 벤젠 냄새가 나는 웅덩이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는 청둥오리 한 마리가 홀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박신용이 찍은 쓰레기 산(山)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살아 있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다. 쓰레기를 분쇄해도, 묻어도 그리고 그 위에 인공 정원이나 호수를 만들어 우리가 묻은 것을 망각하고 부인해도, 쓰레기는 살아 움직이며 가스를 뿜어내고 화학작용을 하며 변형되고 침출수로 흘러나온다. 쓰레기는 유물론이다. 생기론(vitalism)이다. 오랜 시간을 버티고 떠돌다가 언젠가 마주치는 생명체의 세계로, 몸속으로 다시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이 찍은 알바트로스의 사체들을 본 적이 있는가? 죽어 살이 해체되고, 뼈와 깃털만 남은 새들의 위장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플라스틱 조각과 생활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는 사진들.

생명체의 내부로 흘러들어와, 그 생명의 죽음 이후에도 잔존하며 버티는 플라스틱 조각들의 강인한 물성 앞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즉, 우리 시대의 타나토스(thanatos)는 낫을 들고 생명의 목을 치러 다니는 음산하고 무자비한 사신(死神)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21세기의 죽음 충동은 세포와 혈액과 호르몬과 체액 속에 들어와 미세하게 작용하면서 신체에 종양을 형성시키고, 암세포를 활성화시키는, 가령 플라스틱과 같은 미시적 존재자들의 활동력 그 자체다. 그들은 쓰레기의 형태를 띠고 세계를 순환한다. 땅과 바다와 대기와 하천을 떠돈다. 매립지는 도처에 존재한다. 매립지는 타나토스가 운동하는 곳이다. 죽음이 생동감 있게 활력적으로 약동하는 곳이다. 알바트로스의 위장은 미시적 쓰레기 매립지였다. 우리 신체도 잠재적인, 미시적 쓰레기 매립지다. 생명체의 살은 구멍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쓰레기가 발산하는 물리, 화학적 정동(affect)이 분자적으로 스며들어 축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 같은 쓰레기 매립지 위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면서 작가는 생각한다. 이 무덤이 확장되어 언젠가 저 먼 도시에 가 닿을 것이다. 세계는 매립지가 될 것이다. 그의 사진들은 매립지와 도시 사이의 허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시각적 망치와도 같다. 그의 매립지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진에 나오는 매립지를 탐사하러 가서는 안된다. 반대로, 우리는 도처에서 매립지를 보는 눈을 형성시켜야 한다. 매립지의 편재성을 지각할 수 있는 힘을 배워야 한다. 공사 현장의 사진들을 보고 도시의 공사 현장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대신 완벽한 건물, 부동의 존재를 관조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공사 현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부서져가는 잔해의 과정이라는 것을 직관해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므로. 존재에서 사건을 보는 눈의 힘의 확장. 이것이 박신용 미학의 중요한 욕망이 아닐까?

베를린의 공사 현장에서 대부도로, 그리고 쓰레기 매립지로 이동해 온 작가의 시선이 다음에 머물 곳은 어디일까? 그가 탐구할 또 다른 장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벌써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