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지미술에 보내는 오마쥬

서울시 용산에 위치한 삼각지에 가면 우리가 흔히 유치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는‘이발소그림’을 볼 수 있다. 삼각지 미술이란, 쉽게 말해 ‘이발소그림’’키치’라고 할 수 있다. 삼각지에는 값싼 액자 집과 초상화 가게가 즐비하며 아마추어 화가들이 모여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삼각지에는 값싼 액자집과 초상화 가게가 즐비하며 아마추어 화가들이 모여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그림을 그린다. 삼각지미술엔 정통미술의 아류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이미지들이 재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발소그림과 함께 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생활주변에서 이발소 그림을 접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이발소에 걸려 있는 그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과거를 아름답게 장식해주며 소중한 기억, 그러한 정서를 담고 있는 그림인 것이다. 하지만 소위 ‘이발소그림’‘삼각지미술’이라는 것도 이제는 그리 흔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지방의 소도시 다방이나 작은 점방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Homage to Samgakji Art_삼각지미술 예찬〉은 이러한 ‘삼각지 미술’에 대해 다루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삼각지 미술의 미적 가치와 그 의미를 찾아보는 실험이자 삼각지 미술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위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Homage to Samgakji Art_삼각지미술 예찬〉은 현대미술계에서 ‘이발소 그림’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키치’를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가 되어 이루어진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그림을 시작하게 된 류해윤은 생활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이미지와 자신만의 상상력과 추억, 기억을 조합해 합성한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한국의 산수화와 민화의 소재와 기법들이다.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 일컫는 그림의 소재를 차용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변형하여 그만의 개성적인 조형언어로 표현한다. 이처럼 류해윤은 자신이 본 이미지 위에 자신의 기억과 소망을 중첩시킨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본 것과 이른바 ‘미술’이라 통용되는 아름답고 멋있는 장면, 미술의 주된 소재를 따르거나 재구성해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우리가 처음 간직하고 이해했던 미술 과 향수, 위안을 느낄 수 있다. 한때는 삼각지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던 민정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중적이고 건강한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 오고 있다. 70년대 후반 사회적 현실과 유리된 작품을 허구로 간주했던 ‘현실세대’들이 그랬듯이 그가 주목한 것은 현실이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현장의 색채와 공기를, 자연에 충실하여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주로 1980년대 초중반 서울의 도시풍광과 도시생활의 일면을 그렸고 실제 관광지나 산수를 실경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지금도 제주도의 일출봉이나 시골 마을 밭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삶에 굳건히 뿌리박은 민속예술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 종류로서 ‘이발소그림’을 바라본다. 

이준복의 화려하고 연속적인 무늬로 가득 찬 작품은 우리가 언제나 볼 수 있는 ‘아줌마’들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패턴이다. 이 역시 그 동안 예술로 다뤄지지 않았던 주제나 소재인 ‘키치’적 인 것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발소그림’을 과연 누가 살까? 라고 의문을 갖게 마련이지만 정작 우리나라 미술소비시장을 이발소그림이 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촌스러운 무늬의 저 옷을 누가 입을까? 라고 의문을 던지겠지만 아마 의류 소비시장의 대부분을 화려하고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무늬의 옷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준복의 작품 속 아줌마들을 보고 관객은 그 화려한 무늬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이내 그 속의 아줌마들을 보고는 늘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동네 아줌마, 혹은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서 어떤 그리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발소그림에서 느끼는 정서처럼 말이다. 익살스러운 포즈를 잡고 곁눈질을 하는 사람이나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개, 웃고 있는 돼지, 그리고 까치를 즐겨 그리는 최석운은 그러한 사람과 동물을 통해 이 시대의 단면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그의 작품 중 「견월도」는 꼭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 속 인물, 동물들은 언제나 곁눈질하는 듯한 눈을 하고 누구에게나 웃음을 살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중심이 아닌 그 주변부에 있는 것들이며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어렵지 않고 누구나 보아서 알 수 있는, 서민의 정서를 담아낸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황지윤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옛 병풍 속 그림들, 문인화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면 숨은그림찾기처럼 여러 가지 또 다른 그림들을 찾을 수 있다. 흔히 이발소그림에서 볼 수 있는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 돼지라든지 그네를 타는 사람들이라든지 쏟아지는 폭포수 등 익히 보아왔던 친숙한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단순한 풍경 속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숨겨놓은 것으로 관객이 이를 찾아 심리적인 자극을 받고 작가와 관객이 소통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유는 옛 민화, 산수화, 유럽의 풍경화를 차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사실 우리는 겉으로는 이발소그림들을 멸시하고 배척하고 있으면서도 은연중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각지는 분명 미술이 이야기되고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비록 그 역사와 영향이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삼각지 미술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려 한다. 또 삼각지미술의 의미를 확인,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주변과 타자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으면 한다. 또한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노인과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어린이들과 청년층에게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화를, 외국인에게는 한국의 또 다른 면의 문화를 느끼게 해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삼각지의 액자집, 화방, 초상화가게가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용산 뉴타운 개발 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은 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전시 장소를 짚고 넘어가보자. 이번 전시는 일반 전시장이 아닌 ‘오래된 집’에서 한다. 이 곳, 성북동에 있는 오래된 집은 (재)개발로 인해 폐가 직전에 놓였던 집이다. 한옥도 양옥도 아닌 이 오래된 집은 근대 한국 건축양식을 가진 집이라 할 수 있는데, 집의 기본 틀과 지붕은 한옥의 양식을 띄고 있지만 마당이나 창문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고 집의 주인이 바뀌면서 현대식 양옥의 모습도 같이 찾아볼 수 있다. 흙벽과 시멘트, 여러 장 겹쳐있는 벽지가 그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오래된 집이 한식과 양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고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점이 삼각지미술의 처지와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오래된 집에서 삼각지미술에 관한 전시를 한다는 것은 더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삼각지미술을 다시 돌아보고 향수 어린 그곳 풍경의 흔적을 느꼈으면 한다.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곳에는 틀림없이 이발소그림, 삼각지미술이 있을 것이다.